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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시오소] 벌

Posted by @amday_123 over a year ago

*for SAPU님 "어이, 너! 노란색 후디에 야구모자!" 빠르게 나아가던 발걸음이 차츰 느려졌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소년의 입꼬리는 하늘을 향했다. 하아잇! 뭡니까, 오소마츠 니상! 형이라 불린 대상은 어깨를 으쓱이며 소년을 향해 걸어왔다. 땀으로 젖은 앞머리가 소년과 같은 야구모자에 눌려 이마에 붙어 있었다. 한 손에 글러브, 반대쪽에 야구공을 쥔 '니상'은 소년에게 환히 웃어 보였다. 선명한 여름 하늘을 닮았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손에 쥔 금속 야구방망이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시멘트 바닥에 부딪쳤다. "형아랑 오랜만에..거기, (오소마츠라 불린 소년은 검지로 코 밑을 문질렀다) 갈까?" "하잇! 헛스루 헛스루- -맛스루 맛스루! 방과후 연습으로 인해 뭉친 근육이 항의 의사를 내비쳤지만, 소년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 고통마저 쾌감으로 느껴지는 듯 했다. 헛스루 헛스루, 맛스루 맛스루! 소년은 다시 앞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 낡고 초라하고 별 볼일 없지만, 쥬시마츠는 이 동네를 좋아했다. 단순히 제 다섯 형제들과 유년 시절부터 눌러 앉은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현관문을 나서고 딱 쉰 한번째 되는 발자국을 떼는 순간 닿는 야구 필드와 작은 창고가 하나 있었다. 야구부에 든 쥬시마츠에게 이 곳은 좋은 연습 장소이자, 추억이 깃든 곳이었다. 녹슨 철창 뒤에 자리한, 둘 만의 아지트. 비밀 공간. 여섯 쌍둥이 중 야구부를 선택한 건, 소년 뿐만이 아니었기에, '쥬시마츠, 여긴 너 혼자만 아는 거다? '우리'만의 공간으로 해두는 거라고?' 둘만의 추억을 떠올린 소년의 입꼬리는 날카로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 "야구도 슬슬 질리는데~그만둘 때가 됐으려나-" 빠르게 나아가던 발걸음이 차츰 느려졌다. 느릿하게 멈춰선 쥬시마츠가 고개를 돌렸다. 뒤따라오던 오소마츠는 자연스레 그를 지나쳐 앞서 갔다. 독서부나 제과부에 이쁜 애들 많다던데~쵸로마츠랑 같이 독서부나 들어볼까? 뒤통수를 향한 기이한 시선이 따갑지도 않은 지, 소년과 그의 거리는 점차 벌어지고 있었다. 소년의 입 또한, 천 천 히 떼였다. "오소마츠" 평소와 다른 쌀쌀한 말투, 낮은 톤, 그리고...엇나간 호칭에 발걸음이 절로 멈추었다. 어긋난 느낌에 미처 답하기도 전에 소년이 물었다. 오랜만에 가자, 그 곳ㅡ "너 밖에 모르는 내 공간, 말이야" 문장의 끝맺음은, 물음표가 아닌 미묘하게 굳은 입꼬리였다. * 굉음과 함께 들어선 소년의 아지트는 헌 야구 관련 잡동사니로 가득했다. 쾨쾨한 땀 냄새가 먼지, 곰팡이 따위의 냄새와 뒤섞여 불쾌도를 자극했다. 창고 특유의 미적지근한 공기와 제 고개에 고정된 냉기어린 시선에 마른땀이 절로 맺혔다. 창고 바닥에 그의 두 발이 안착한 순간, 소년은 제 형을 구석에 밀쳐 넣고 야구방망이를 집어 들었다. 오소마츠가 손쓸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야이...갑자기 왜 그-" - 장난 같아? 나랑 같이 있는 게, 장난이냐고. 귓가에 들려오는 서느런 목소리에 오소마츠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눈 앞에 마주한 노란 후드의 소년은 마치 쥬시마츠의 얼굴을 한 다른 사람 같았다. 싸느란 태도, 목소리, 그리고 눈빛까지...소년은 다시 한번 고개를 내밀며 속삭였다. "오늘은..벌을 좀 받아야겠어" ..니상. 형이라 불린 오소마츠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소년은 뒤로 잠시 물러서는가 싶더니, 힘차게-아주 조용하게-팔을 휘둘렀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오소마츠의 몸이 모래 바닥을 훑으며 쓰러졌다. 땀으로 젖은 앞머리에 모래알이 뒤엉켰다. 쥬시마츠는 그런 형을 내려다 보며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손에 쥔 금속 야구방망이가 또 한번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부딪쳤다) 입꼬리는, 여전히 제자리였다. 자신을 올려다 보는 형의 눈에 비친 건, 명백한 혼란, 또 겁 그 자체였다. 시퍼렇게 질린 그의 얼굴을 보며, 쥬시마츠는 생각했다: 생생하고 푸르께한 그 얼굴이, 마치 여름 하늘을 닮았노라고. *공백제외 1460자 *키워드: 너 밖에 모르는 내 공간으로 와. 오늘은 벌을 좀 줘야겠으니까. read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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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고오소] 空白 (공백)

Posted by @amday_123 over a year ago

공백 토고오소 비가 오는 날, 아저씨는 말없이 집을 나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문을 열어두고 내 발목을 밧줄로 묶어놓더니ㅡ평소답지 않게ㅡ칼을 옆에 두고 말이다. 난 멍청하게 그렇게 며칠을 기다렸고, 나흘 뒤에 경찰들에게 발견되었다. 가족들은 삼 년만에 찾은 날 부둥켜 안으며 울었고, 난 돌아오지 않은 아저씨를 떠올리며 슬피 울었다. 그렇게 이주일이 지났고, 난 여전히 방에서 꿈쩍않고 있었다. 아저씨가 다시 돌아올 것만 같았다. 아저씨는 왜 날 그렇게 내버려 두고 간걸까? 강제로 먼저 데려와 때릴 땐 언제고? 그짓거리를 삼년 넘게 해놓고 이제서야 왜? 양심에 찔려서? 죄책감이 들어서? 답은, 이틀 뒤 풀렸다. 엄마가 정신병원에서 온 음성 메세지를 확인하는 것을 엿들은 탓이었다. - 그 날도 난 우산을 챙겨 나갔다. 낡은 아저씨 정장과 같은 체크무늬였다. 아저씨를 떠올릴 만한 건 다 치워두겠다더니..가족은, 떼어 지낸 시간만큼 나에 대한 공백이 너무 컸던 모양이다. - 병원은 그리 멀지 않았고, 방은 1인실이었다ㅡ이게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웃기시네, 돈이 어디있다고 이런 곳에 들어갔데. 속으로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태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어라? 문이 잠겨 있다. 그제서야, 화가 조금씩 끓었다. "씨발, 아저씨! 문 열어!" 미처 손쓸 새도 없이 욕설이 튀어나왔다ㅡ분명 학교에서 나쁜 행동이니 하지 말라 가르쳤던 걸로 기억하는데..아저씨 밑에 깔려 자주 들은 탓일까, 거친 단어들이 자연스럽게 혀를 미끄러져 내려와 텅빈 병동 복도에 흩뿌려졌다. (그러고 보니, 난 씨발이라는 단어가 무얼 뜻하는 지 몰랐다. 무슨 의미일까? 날 보고 하는 소리였다면, 좋은 소리는 아녔겠지?) 곧이어 주먹과 더러운 운동화가 내 앞을 가로막는 문을 열기 위해 동원되었다. 과격한 주먹과 발길질 세례에 복도 끝 전등 불빛이 깜빡였다. 수만가지 감정이 들끓었다. 그때, 문 너머로 작은 한숨 소리가 새어 나오더니,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빛은 여전히 깜빡였다. " 기껏 풀어줬더니만, 왜 여기까지 쫓아온거야 ? (계속 깜빡,) 오소마츠, 진짜 죽이기 전에 썩 꺼져라. (또 깜빡, 대던 불빛은) ..망할 놈의 새끼.. (점차 옅어지더니 이내 정전이 되어 사라졌다 ) "..하여간 말도 더럽게 안 듣지.." ... ... 그리고 정적. "...아저씨." 허름한 정신병원 1인실 문 너머로 아저씨는, 뒤늦게 날 포기했다고 선언했다. 긴 침묵 끝...그제서야 입이 떼였다. "..하..?" 까끌거리는 입술이 맞닿을 때마다 따끔거리는 게, 기분이 더러웠다. 곤두선 신경은 이성을 차츰 마비시켰다 (조금씩.. 점점... ...)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눈가가 붉게 타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문 너머로 날카로운 찰칵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문고리가 아닌 라이터 소리임을 깨닫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저씨...말 본새가 좀 웃긴다?" 기껏 풀어줬더니만.. 진짜 죽이기 전에 썩 꺼져라.. ...망할 놈의 새끼... "누구한테 할 소린데 지금..듣고 이해할 만한 말을 해야 내가 듣든 말든 하지.." 복도가 휘청이고 천장이 흔들리는데도, 이상하게 눈 앞 낡은 병실 문은 끄떡않고 서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문에 부딪친 머리가 얼얼한 것도 잠시, 머리 끝까지 차오른 열 탓에 머릿속이 끝없이 울렁거렸다. "..아저씨!!!" 화에 지나치게 달아오른 머리 탓일까ㅡ머릿속이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과 함께 생각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에 기대어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기껏 내뱉은 아저씨의 이름에 쇳소리가 함께 울렸다. 한 방울, 또 한 방울...혼란 속 미처 바로잡지 못한 단어들이 눈가를 타고 흘러 내렸다. "고작 이거야... ...? 아저씨가 나한테 해줄 수 있는 게? ​3년 전..아저씨한테 끌려왔을 때부터 난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며..아저씨 본인 입으로 들려줬었잖아-이 세계에 대해서 말이야 네가 그때 보여줬던 세계는 뭐야? 주먹질, 깔리는 짓거리, 욕설, 티비 보기, 그리고 부대끼며 자는 척하는 게 전부였던 우리 세계.. 그게 현실이라며 더럽고 구질구질한데 숨은 알아서 안 끊어지니 어쩔 수 없이 쉬며 사는거라며..그렇게 만든 현실에 날 집어 쳐넣어 놓고..이제서야, 날 놓아주겠다고? 그럼 내 현실은 새로 어떻게 찾지? 어떻게 알아서 만들어 가라는거지? xx...(눈물 방울은 이내 구정물이 되어 색이 바랜 후드를 엉망으로 얼룩져 놓는다. 기껏 챙겨 온 체크무늬 우산은 영 쓸모가 없었다) 칼 두고 간 게 그 때문이야? 숨은 알아서 끊어지는 게 아니니까..알아서 도망치던지, 알아서 끊어먹던지 하라고? 만약.. 만약에..있잖아, 숨을 깊게 들이 마쉬었다. 멀리서 누군가 달려오는 발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아저씨가...내 숨이라면? 문은 쪼금 열어놓고, 발목은 피가 안 통할 정도로 억세게 묶어놓고..손이 닿는 곳에 칼을 두고 사라져 버린 게..날 놔주는 게 아니라면? 도리어 내 숨을 앗아가는 거라면..? (멀리서 들려오는 낡은 운동화 소리가 점점 커져만 간다. 빗 속을 달리며 날 애타게 찾아다닌 듯한 운동화가 축축한 바닥을 미끄러져 온다) 따끔거리는 느낌이 눈가에서 입술, 목구멍까지 타고 내려왔다. 내 이름을 외치는 목소리는 마지막까지ㅡ애석하게도ㅡ문 너머에서 들려오지 않았다. 현실은 더럽게 모순적이고 한심하다더니, 지금이 딱 그렇네. 아저씨가 말했고 지금 내가 말하는 현실처럼...감기는 시야 너머로 연두색 후드가 일렁였다. 마지막 뜨거운 숨을 뱉고 남은 건 공백 딱 그뿐이었다. *공백포함 2,836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read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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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고오소] 공백

Posted by @amday_123 over a year ago

비가 오는 날, 아저씨는 말없이 집을 나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문을 열어두고 내 발목을 밧줄로 묶어놓더니ㅡ평소답지 않게ㅡ칼을 옆에 두고 말이다. 난 멍청하게 그렇게 며칠을 기다렸고, 나흘 뒤에 경찰들에게 발견되었다. 가족들은 삼 년만에 찾은 날 부둥켜 안으며 울었고, 난 돌아오지 않은 아저씨를 떠올리며 슬피 울었다. 그렇게 이주일이 지났고, 난 여전히 방에서 꿈쩍않고 있었다. 아저씨가 다시 돌아올 것만 같았다. 아저씨는 왜 날 그렇게 내버려 두고 간걸까? 강제로 먼저 데려와 때릴 땐 언제고? 그짓거리를 삼년 넘게 해놓고 이제서야 왜? 양심에 찔려서? 죄책감이 들어서? 답은, 이틀 뒤 풀렸다. 엄마가 정신병원에서 온 음성 메세지를 확인하는 것을 엿들은 탓이었다. - 그 날도 난 우산을 챙겨 나갔다. 낡은 아저씨 정장과 같은 체크무늬였다. 아저씨를 떠올릴 만한 건 다 치워두겠다더니..가족은, 떼어 지낸 시간만큼 나에 대한 공백이 너무 컸던 모양이다. - 병원은 그리 멀지 않았고, 방은 1인실이었다ㅡ이게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웃기시네, 돈이 어디있다고 이런 곳에 들어갔데. 속으로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태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어라? 문이 잠겨 있다. 그제서야, 화가 조금씩 끓었다. "씨발, 아저씨! 문 열어!" 미처 손쓸 새도 없이 욕설이 튀어나왔다ㅡ분명 학교에서 나쁜 행동이니 하지 말라 가르쳤던 걸로 기억하는데..아저씨 밑에 깔려 자주 들은 탓일까, 거친 단어들이 자연스럽게 혀를 미끄러져 내려와 텅빈 병동 복도에 흩뿌려졌다. (그러고 보니, 난 씨발이라는 단어가 무얼 뜻하는 지 몰랐다. 무슨 의미일까? 날 보고 하는 소리였다면, 좋은 소리는 아녔겠지?) 곧이어 주먹과 더러운 운동화가 내 앞을 가로막는 문을 열기 위해 동원되었다. 과격한 주먹과 발길질 세례에 복도 끝 전등 불빛이 깜빡였다. 수만가지 감정이 들끓었다. 그때, 문 너머로 작은 한숨 소리가 새어 나오더니,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빛은 여전히 깜빡였다. " 기껏 풀어줬더니만, 왜 여기까지 쫓아온거야 ? (계속 깜빡,) 오소마츠, 진짜 죽이기 전에 썩 꺼져라. (또 깜빡, 대던 불빛은) ..망할 놈의 새끼.. (점차 옅어지더니 이내 정전이 되어 사라졌다 ) "..하여간 말도 더럽게 안 듣지.." ... ... 그리고 정적. "...아저씨." 허름한 정신병원 1인실 문 너머로 아저씨는 , 뒤늦게 날 포기했음을 선언했다. read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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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오소] 녹 (綠)

Posted by @amday_123 over a year ago

흐린 어느 날의 기차역 근처 낚시터는 한산했다. 6월 후반이라고 하기엔 조금 쌀쌀한 탓에 입고 있던 정장 상의를 좀더 여몄다. 주머니 속을 지키던 푼돈은 모처럼 찾은 이 곳에서 한 시간 남짓한 여유를 허락했다. 마지막으로 기억한 푸른 낚싯대 손잡이는 조금 슬어 붉은 빛을 띄고 있었다. 작은 웃음이 픽 하고 흘러나왔다. '마지막으로 여길 함께 찾은 게 언제였더라...' 작은 미끼를 꿴 낚시고리가 찰랑 소리를 뒤로 조용히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아무리 곰곰히 생각해 봐도 뭔가 뾰족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플라스틱 의자가 삐걱거렸다. 언제였더라...(흐린 기억 속을 계속 방황했다). 마지막...(손에 들린 도구와 함께 제 생각도 함께 녹슨 듯 했다). 함께...(그렇게 가물가물, 정신이 흐려 오는 듯 했다)... 함께ㅡ...아. 기억 너머로 어렴풋이 느껴지는 손길이 따스했다ㅡ정장이 아닌 가죽자켓을 입은 제 등에 느껴지는 작고, 투박한 손길이었다. 혼자서 무언가에 만족한 듯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도 옆에서 들리는 듯 했다. 정신없이 더럽혀진 기억이 점차 모호하게, 분명하게 정리되어 가는 듯 했다. 손길은, 그 웃음은...환하게 한결같이 저를 반겨주었다. 마치 빛 한줄기가 제 뿌연 머릿속에 새어든 듯 기억은 그렇게 조금씩, 느리게 분명해졌다. [...] 고민이 있다. - 넌 좀 고민하고 사는 게 좋겠지 ..근데 나도 그런가? [...] 아프다는 게 무슨 소리지? 보다 보면 내가 다 쓰라린 게 너니까, 그 부분이 사라지면 재미없잖아? [...] 어째서 나는... 괜찮아, 괜찮아. 너는 변하지 않아도 된다고? 네 주변 세상이...미 쳐 돌아가면 되는거니까ㅡ 그거면 된거라고? 아. 가슴 한 켠이 따끔거렸다. 낚시대는 제 손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마치, 그 때 그 날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웃음소리가 들리던 자리로 돌아 보았다. 낡은 플라스틱 의자만이 덩그라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 네가 여기 있을 리가 없지. 내가 변한 이후 너는 전혀 괜찮지 않았으니까; 계속, 줄곧 아파한 건 너였으니까; 미쳐 돌아간 건, 세상이 아니라...마지막 말은 차마 더 이을 수 없었다. 결국 그 날도 난 고기를 잡을 수 없었다. 부옇게 된 시야 탓이었을까ㅡ추억 속의 그대는, 여전히 흐렸다. * 아무 말도 아무 일도 아무 예감도 없이 아무렇지 않게 하룬 가고 아무 말도 아무 일도 아무 예감도 없이 아무렇지 않게 나도 - MOT, 서울은 흐림 read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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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오소] 나비 작전

Posted by @amday_123 over a year ago

흰 나비는, 오늘도 날개를 펄럭거리지 못했다. 이치 x 오소 얇고 볼품없는 날개는 오늘도 굵은 핏방울들로 얼룩이 졌다. 화려하게 수놓아진 붉은 방울 무늬는 흰 피부에 반사되며 더 짙은 색을 띠었다. 날개에 그어진 비뚤배뚤한 선은 이내 칙칙한 적갈색에서 푸르스름한 빛깔로 천천히 탈바꿈했다. 제 파카 색을 연상시키는 보랏빛으로였다. 이 짓을 시작했을 때부터 쭉 지켜봐 온 과정이지만, 매번 볼수록 참 새롭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고 이치마츠는 생각했다. 색이 완전히 자색으로 바뀜과 동시에 그의 시선은 손목을 타고 흐르는 핏방울들을 좇아 바닥으로 향했다. 그제야, 상처가 따끔거렸다. '아프네...' 썩 경쾌하지 못한 달칵 소리와 함께 작은 불꽃이 일었다. 흐린 담배 향이 금세 방 안을 채웠다. 담배 끄트머리를 마른 입술로 살짝 물어 보였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나약한 소리 하나 새어 나오지 않았다. 갈 곳 잃은 나비를 보며, 이치마츠는 태연하게 그의 이름을 대체할 표시 하나를 새겼다. 붉은색이 잘 어울리는, 숫자 1이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 장남이 이치마츠의 자해를 눈치챈 건, 겨울이 끝나가는 어느 날 밤이었다. 유난히 잠이 오지 않던 밤, 이치마츠는 또 한 번 형의 꿈을 꾸었다. 제 손목에 앉아 있던 흰 나비들이 오소마츠를 감싸며 붉게 물들어갔다. 날개가 흠뻑 젖은 나비들은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힘없이 추락했고, 오소마츠 또한 눈을 감은 채 제가 만든 핏빛 웅덩이에 빠져버렸다. 소리 없이 형의 이름을 외치며 깬 소년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제 서랍장을 향했다. 드르륵. 커터칼을 빼내는 손길이 영 서툴렀다. 길지 않았던 악몽이 시야를 빠르게 스쳐지느냐며 자꾸만 정신을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칼을 다루는 데에 온 정신을 쏟던 그는, 그의 뒤를 밟던 조용한 인기척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치마츠?" 굳이 뒤돌지 않아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소년은 더더욱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얌전히 꿇은 두 다리를 모으며 그 사이로 고개를 떨굴 뿐, 소년은 그 어떤 부정의 말도 할 수 없었다. 채 다 뽑지 못한 커터칼이 떨어져 볼품없는 소리를 냈다. 타일 바닥을 딛는 맨발 소리가 가까워지는 걸 끝으로, 이치마츠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침묵. 이윽고 오소마츠의 큰 손이 이치마츠의 머리를 매만져주었다. 투박하고 어색하지만, 꽤나 다정어린 손길이었다. 소년의 무릎을 덮은 잠옷 자락이 촉촉이 젖어들어 갔다. 아직 겨울이 채 지나지 않은, 깊은 밤이었다. * 봄이 찾아왔건만, 여전히 나비는 날지 못했다. 이치마츠는 그 날 이후로 손목에 두꺼운 붕대를 감싸고 다녔다. 커터칼 금지령이 내려지고, 그 외 날카로운 물건들에도 손 하나 댈 수 없었다. 창백한 흰 나비는 점점 옅어져 갔건만, 소년은 계속 붕대를 풀 수 없었다. 그의 자해 소식을 모르는 형제들 탓에 그는 제 파카를 쭉 입은 채 겨울을 보내야 했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에도 그 악몽이 종종 그를 괴롭혔지만, 그럴 때마다 오소마츠가 이치마츠의 곁을 지켜주며 위로했다. 이제 그의 머리를 익숙하게 쓰다듬어주는 오소마츠를 바라보던 이치마츠는 이내 그의 품에 고개를 파묻었다. 바보,ㅡ이치마츠는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ㅡ내가 이 짓을 시작한 게 누구 탓인데. 그의 파카는 붉고 따뜻하며, 은은한 아카시아 향을 달고 있었다. 형이 전에 읽은 동화책 속 공주님 정원에 핀 어여쁜 꽃밭을 닮았다는 생각과 함께, 이치마츠는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마치 희고 섬세한 날개를 가진 아름다운 나비처럼. 그렇게 이치마츠는 서서히 소년티를 벗어내기 시작했다. 나비는, 제 첫사랑을 나타내는 숫자를 소중히 품은 채 천천히 흔적을 감추어갔다. * 봄날의 공기는 따뜻하면서도 정신을 흐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고 오소마츠는 생각했다. 이치마츠가 악몽을 꾸는 밤엔 오소마츠는 잘 수 없었다. 이치마츠가 밤새 그의 품에 기대어 울다 지쳐 잠들 때까지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등을 다독여줘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매번 동이 틀 때쯤에야 제 여린 동생을 품에서 떼어놓을 수 있었다. 그 밤을 무사히 넘기고 나면 종일 졸아버리는 게 흠이지만, 다행히 오소마츠는 이치마츠를 돕는 걸 꺼리지 않았다ㅡ오히려 많이 기뻐하고, 흐뭇해하며 행복해했다. 창문을 열어놓으니 봄바람에 달큼한 향이 실려 방안을 가득 채웠다. 이렇게 나른해지는 시간에 무거운 눈꺼풀을 끔뻑거리기도 그날 밤을 새운 이한텐 꽤 힘든 일이었다. 하품만 늘어지게 내놓던 오소마츠는 이내 낮은 식탁에 머리를 맞대었다. 몽롱한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낡은 서랍장을 향했다. 한동안, 그렇게 머물렀다. * 이치마츠는 어릴 때부터 천방지축인 여섯 쌍둥이 중에서도 유독 조용한 편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더라도, 과거에는 꽤 성실하고 상냥했었다ㅡ육둥이를 전혀 구분 못 하는 어른들도 동네에 착한 아이를 꼽으라면 대부분 이치마츠를 거론할 정도로. 하지만 그 조용하고 말 없는 성격이 장점에서 콤플렉스가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불투명해진 정체성과 함께 존재감은 미미해졌다. 그의 발걸음 소리는 어딜 가도ㅡ귀 기울여 듣지 않는 이상,ㅡ들리지 않았다. 어느 때보다 일찍 외출을 마친 그 날 역시 마찬가지였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더워지기 아직은 조금 이른 여름의 늦은 오후였다. 목이 말라 부엌을 들를까 하다, 위층 식탁에 있는 카라마츠의 물병이 떠올랐다. 반짝이로 장식된, 촌스러운 디자인이었다. 그 안에 좋아하는 음료를 담아 은근히 자랑하는 차남의 얼굴이 떠올랐다. 쿠소마츠 거니까, 뭐... 양심의 가책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의식 흐름이었다. 방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의식의 흐름은 느릿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이치마츠가 그 익숙한 냄새를 맡지 않았더라면, 그 흐름은 고요히 쭉 이어졌을 것이다.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형?" 어지러운 침묵을 잇다 겨우 내뱉은 게 이거였다ㅡ물론, 소리는 나지 않았다: 이치마츠는 조용하고 말이 없는 편이었으니까ㅡ. 끝맺지 못한 문장 밑으로 수많은 물음표가 추락해 부서져만 갔다. 비릿한 향을 들이마시자 정신이 아찔했다. 다급히 입을 부여막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삐끗한 발목과 함께 변기 앞으로 힘없이 쓰러진 이치마츠는 그렇게 토해냈다. 쉬지 않고 구역질하고 뱉으며 악을 쓰는 그의 표정은 결코 읽을 수 없었다. '뭐야.. '내가 뭘 본 거야... '형이...... '어째서....... 그 어디에도 마침표가 찍힐 곳이 없었다. 변기에 한껏 숙인 머리 너머로 물음표만 잔뜩 떠다녔다. 느리게 감았다 뜬 눈꺼풀 사이로 흰 나비가 아른거렸다. 굵은 핏방울로 창백한 날개자락을 물들인 나비... 그것은 이치마츠의 손목에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식탁에 머리를 맞대고 자는 형의 팔에 수많은 나비가 자리했다. 붉은 후드 소맷자락으로 겨우 가려진 작고 빼뚤빼뚤한 나비를 시작으로ㅡ제일 짙은 빨간빛을 띄고 있는 것을 봐서 그 나비가 첫 자해의 흔적이었을 거라 소년은 말없이 추측했다ㅡ크기도 모양도 다른 나비들이 형의 팔 새겨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소마츠는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 단 한 번도 형제들 앞에서 후드를 벗은 적이 없었다) 그의 손에는 제 서랍장에 고이 넣어둔 커터칼이, 끝에 피가 새로 굳은 채, 들려 있었다. 흔들리는 시야에 억지로 힘을 주며 형의 첫 번째 나비에 적힌 걸 이치마츠는ㅡ ... 결국 보고야 말았다. 형의 작은 나비에 아프게 각인된 흉터 자국 하나를. 그 검붉은, 결코 씻어낼 수도, 잊을 수도 없을 감정이 담긴 표시를. 한때 붉은색이 잘 어울렸을, 숫자 1을. read more